UR에 관심 갖기 시작한 국내

1989년 4월에 합의한 몬트리올 각료회의(88년 12월) 결과로 UR은 90년 12월 브뤼셀 각료회의에서 종결하기로 되어 있다. 따라서 89년 말까지는 각국의 제안을 받고 90년 8월까지 각 협상 구릅별 협상을 진행하고 90년 11월 말까지 협상결과를 문서로 취합하여 12월 3일에서 7일까지 브뤼셀에서 최종합의를 이루는 계획이었다. 

이에 따라 미국은 89년 10월 모든 비관세 조치를 관세화 하는 구체적 방안을 2차 제안을 통하여 제시하고 수출보조도 5년 내 철폐하는 내용을 내고, EC는 89년 12월에 보조금의 단계적 감축방안을 제시하였으며 또한 한국과 일본은 관세화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주장하는 안을 제시하였다. 각국의 안을 종합한 농업위원회 드쥬 의장은 모든 농산물은 관세화로 하면서도 식량안보를 위한 극히 일부품목에 한하여 관세화 예외를 인정하는 종합안을 내면서 각국에게는 90년 10월 1일과 5일까지 일제히 감축계획서(C/L 및 O/L)를 제출하도록 요구하였다.

이와 같은 GATT의 농산물 개방 감축계획 제출 요구가 국내에 알려지자 농민단체로부터 강한 반발이 나왔으며 정부가 관세화 예외로 가겠다는 품목 선정에 관심이 커지기 시작하였다.

정부는 90년 10월 6일 경제장관회의를 열고 관세화 제외 품목으로 쌀을 포함한 9개 품목(돼지, 소, 닭, 우유, 고추, 마늘, 참깨, 보리)으로 결정하고 공청회(10월 16일)를 거쳐 추가로 6개 품목(콩, 옥수수, 양파, 감귤, 고구마, 감자)을 선정하여 최종 15개 품목으로 결정(10월 24일 경제장관회의)하고 10월 29일 GATT 사무국에 감축계획서를 제출하였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개방(관세화)에서 제외하는 15개 품목은 우리 농산물 생산액의 85%에 달하여 사실은 개방을 못하겠다는 뜻과 같다.

실패로 끝난 브뤼셀 각료회의(90.12.3∼7) 

각료회의 전에 끝내야 할 합의문이 미국·EC의 대립으로 합의 작성되지 못한 채로 각국 대표가 브뤼셀로 모였다. 어쩌면 회의 결렬이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고 하겠다. 12월 3일 브뤼셀 교외 국제 전시장에는 95개국 각료 117명을 포함한 1500명의 대표와 기자단으로 그때까지의 통상관계로는 최대 규모로 열렸다. 우리나라는 박필수 상공장관을 수석으로 하는 35명의 대표단(농업부문 : 조경식 장관 외 11명)이 참석하였다. 회의는 8개 분야에서 진행되었으나 가장 큰 관심의 초점은 농업부문 협상, 특히 미국과 EC의 합의에 있었다. 두 주요 협상국 사이의 합의가 부진하자 농업위 의장을 맡은 Helstrom 스웨덴 농업장관이 중재안(Non Paper)을 내고(6일 16시), 4시간 후인 20시 회의에서 간단하게 그 안을 받을지, 말지(Take it or leave it 즉 Yes or no)를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그 중재안에는 모든 농산물을 관세화 하여 5년간 30% 감축하는 내용으로 한국, 일본이 요구한 가장 중요한 관세화 예외 조항이 없었다. 또한 수출보조, 국내보조도 5년간 30% 감축하는 방안이었다. 긴장감이 감도는 6일 20시 마지막 회의에서 미국과 케언즈 국가들은 찬성을 표시하고, EC는 반대의 뜻인 유보(Reservation)를, 한국, 일본, 핀란드, 이스라엘이 반대를 표시하였다. 특히 한국의 조경식 장관은 가장 강한 표현(can not accept ∼)으로 반대하였다.(발언 마지막 부문 : We can not accept this non-paper as a basis for the successful conclusion of the Urguay Round of Agricultural Negotiation)

이와 같이 찬반의 의견 대립으로 의장 중재안이 채택되지 못하자 협상은 중단되고, 마지막 날인 12월 7일 총회 의장은 성명을 내고 던켈 총장에게 91년부터 재개를 요청하고 회의를 종결하였다. 사실 이와 같은 협상 결렬의 배경, 특히 EC의 입장은 프랑스가 있었다는 것이 뒤늦게 알려졌다. 처음 의장 중재안이 나왔을 때 EC 집행위는 찬성 기류(중재안 내용이 EC 주장에 가까움)로 합의 가능성이 알려지자 이를 안 프랑스가 강하게 반대하여 EC가 반대로 돌아 섰다는 것이다.(GATT 50년사, Tim Tosling 외 2인, 시와꾸지로 역 p193) 실제 이 각료회의 결렬은 한국도 일본도 아닌 농업강국 프랑스의 드러나지 않은 힘 때문이었다.

다자협상 실패의 희생양(Scape goat)을 찾다

다자협상에서의 실패는 원인자를 지목하는 Blame Game과 함께 희생양(Scape goat) 찾기가 시작된다. 특히 우리의 강한 반대(can not accept)는 대내외적으로 큰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회의 후 외신은 일제히 UR이 EC, 일본, 한국의 반대로 결렬되었다고 보도했다. 곧 바로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성명(12월 7일)을 통해 “브뤼셀의 결렬은 충분한 경제력을 갖고 있는 한국, 일본, EC와 같은 국가들의 농산물 개혁을 위한 협상의 부재에 기인”한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 특히 한국을 가장 먼저 거명한 것에 대한 국내 반응은 컸다. 산업계는 이미 EC의 반대로 결렬될 것을 뻔히 알면서 괜히 우리가 나서서 반대하여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고 농업 대표단에 불만의 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따라서 협상 실패의 원인으로 지목 받은 EC, 일본, 한국은 그냥 있을 수만 없게 되었다.  먼저 EC는 12월 14일 맥쉐리 농업담당 집행위원이 워싱턴으로 날아가 야이터 농무장관을 만나 향후 협상 타결의 낙관론을 표명하고 현행 EC의 농업정책(CAP)의 재검토를 시사하고, 일본도 쌀을 제외한 수입 금지 품목의 최소시장 3%의 수입 허용을 보장하는 변경을 시사 하였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입장 변경 요구는 강하였다. 12월 13일 파견한 조순특사에게 힐스 USTR 대표는 “UR 타결 전망은 브뤼셀에서 협상 진전을 거부한 국가의 행동에 달려있다. 이들 국가의 정치적 결단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면서 전방위적인 압력을 가했다. 결국 정부는 수석대표였던 상공부장관을 경질하고 90년 말부터는 신축적인 협상 대안 마련을 위한 작업을 서둘러 91년 1월 9일(대외협력위원회)에 관세화 예외(NTC) 15개 품목에서 쌀외 2∼3개 품목으로 축소하는 내부적 협상안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91년 1월 15일 GATT의 TNC 회의에서 체코 주재 선준영 대사는 “아국의 입장을 전향적으로 재검토하였으며 향후 협상 진전에 따라 구체적 내용을 제시할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는 등 유연성을 보였다. 

변경한 협상안은 마지막 단계까지 제시하지 않아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수정 변경한 협상대안(관세화 예외 15 품목 → 쌀 제외 2∼3품목으로 축소)을 UR 협상이 끝나가는 93년 12월 초까지 한 번도 제시하지 않았다. 만약 우리가 서둘러 그 변경 안을 제시하였다면 참깨(700%), 마늘(400%), 고추(300%), 등 고율의 관세를 얻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쌀 최종협상에 도움을 준 브뤼셀의 강성발언 

또한 브뤼셀에서 보여준 우리의 강한 반대의사 표시는 그 후 다른 협상 참여국에게 우리의 어려운 입장을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특히 93년 협상 종반에 우리의 쌀 문제 부각과 함께 이에 따른 다른 회원국들의 미국과의 한국의 쌀 관세 유예화 협상 결과에 전혀 이의 제기가 없었던 점을 미루어 볼 때 이와 깊이 연관된 것이 아닌가 한다.